민족의 수난 - 경성제국대학
- 홍순주
- 조회수2820
- 2008-11-19
조선 고종 시절 1905년 한일 을사늑약이 강제로 이루어지자 당시 조선의 국립대학이었던 성균
관의 마지막 대제학(현 대학 총장)이었던 민영환은 민족의 수치에 분노하여 할복 자살을 단행
하자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성균관을 필두로 하여 전국의 유생들이 분연히 일어나서 민족의
독립을 외치며 일제에 항쟁하게 된다.
이에 일제는 독립 자주의 온상인 성균관의 학문적 기능을 해체하여 공자 문묘 제사나 드리는
경학원으로 격을 낮추어서 이를 견제하고 다 알다시피 일제가 한국의 식민 통치를 원할하게 하
기위해 동경 제국대학의 서울 분교격인 경성 제국대학을 세우게 된다.
민족의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해방후 경성제대를 즉각 폐교 조치를 해야하는 데도 불구하고 당
시 남한을 장악한 미 하지 군정이 정치 조직과 자금이 부족한 이승만 정권에게 친일파 세력을
합세하게 한 후 백범 김구 등 민족주의 세력을 누르고자 친일파 양성소였던 경성제대를 미 군
정이 이번에는 친미세력을 양성하기 위하여 억지로 서울대로 개편하여 우리나라의 정통성을 무
시한 채 이를 국립대학으로 만든다.
그래서 이 당시 일제에 타협적이었던 인물들과 미국에서 공부하였던 친미적 세력들이 즉 오천
석,유억겸, 김성수(동아일보 사주), 백낙준(연세대 총장), 김활란(이화여대 총장), 현상윤(고
려대 총장) 등이 미군정 학무 국장이었던 라카드(lockard) 대위를 중심으로 서로 결탁하여 경
성제대를 국민의 동의 절차도 없이 불법으로 서울 국립 대학으로 만들고 1946년 8월, 초대 총
장에 미군정청의 일개 고문관 앤스테드(Anstead)가 취임하는 대학 역사상 부끄러운 일이 벌어
진다..
(성대 600주년 기념 문집 참조)
이에 우리나라의 양식있는 지식인을 포함하여 전 국민이 경성제대의 서울대 개편을 결사적으
로 막기위한 국대화 반대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데 이는 미군정의 신탁 통치 반대
운동과 거의 쌍벽을 이룰 만한 민족적 국민 운동이었지만 기득권 세력에 의해서 이런 역사적
사실을 교과서에서 삭제되거나 일체 언론 보도를 고의적으로 막아 왔기 때문에 국민들은 이러
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기득권 언론세력의 횡포로 민족적 수난이 현재 중앙일보 대학평가로 계속 이어지고 있
다.
국가적 수난기에 일제가 강제로 설립했거나 민족을 배신했던 친일 친미계 세력들에 의해서 세
위진 정통성이 없는 대학들이 오늘날 중앙일보 등 기득권 세력에 의해서 평판도가 높은 대학
(서울대, 연고대)으로 그릇 평가되어 대학평가 최상위권에 임의로 배치되어 발표되고 있는 것
이다.
반면에 민족 정통대학으로 평판도가 가장 높아야 하고 실제로 교육과학기술부 등 공신력 있
는 정부 및 공공기관 대학평가에서 대상(1위)를 차지한 성균관 대학교는 중앙일보에 의해서 평
판도 가중치가 의도적으로 낮게 잡혀서 최 상위권에로의 진입을 고의로 배제시키고 있다.
중앙일보의 대학 서열 세우기 작업은 앞에서 밝혔듯이 해방 후 친일 친미계 교육인사들 이 미
군정과 결탁하여 경성제대를 서울 국립대로 만드는 과정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참고로 아래 자료는 네이버에서 검색한 경성제국대학 내용입니다.
1920년 6월 100여 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재단법인 조선교육회(朝鮮敎育會)를 발기하고 '조선민
립대학설립운동'을 전개하여 종합대학의 설립을 추진하자, 이에 일제(日帝)가 한국인의 고등
교육기관인 성균관을 봉쇄할 목적으로 경성제대를 설립한 것이다.
이 학교에는 조선사람의 독립의식을 고양시킬 수 있는 정치·경제·이공 등의 학부는 설치되
지 않았고, 일제의 식민통치에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법문학부·의학부만 설치하였으며 1
941년에 이공학부를 설치하였다.
또한 교수와 학생의 구성에서도 차별을 받아 1926년 개교 당시 조선인 교수는 전체 57명 중 5
명, 학생은 150명 중 47명에 불과했다.
이러한 경향은 이후에도 지속되어 1941년에는 교수 140명 중 1명.(한국인 교수는 매국노 이완
용의 외질손 이병도로서 조선사 편수회에서 우리 역사를 왜곡한 대가로 교수직 얻음), 학생 61
1명 중 216명만이 조선사람이었다
1924년에 경성제국대학 관제가 공포된 후 예과(豫科)가 먼저 개설되고 1926년 법문학부와 의학
부가 설립되면서 초대총장으로 핫토리 우노키치[服部宇之吉]가 취임하였다.
1926년 2월에 법문학부 교사가 준공되어 학부가 개강하였으며, 같은 해 5월 청량리에 예과교
사, 1927년에 의학부 교사가 준공되었다.
1928년에는 법문학부 본관을 준공하고 조선총독부 병원을 의학부 부속병원으로 이관하였다.
1929년 4월 처음으로 법문학부 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1934년에는 학부의 수업연한을 2년에
서 3년으로 연장하였으며, 1938년 이공학부를 증설하였다.
8·15광복과 더불어 경성대학으로 바뀌었다가, 1946년 '국립서울대학교설립안'이 공포되어 경
성법학전문학교·경성경제전문학교·경성치과전문학교,
경성이학전문학교·경성광산전문학교·경성사범학교·경성여자사범학교·
경성공업전문학교·수원농림전문학교 등 9개 전문학교와 통합되어,
지금의 국립 서울대학교로 바뀌었다.